냉정한 승부의 세계를 뛰어넘은 뜨거운 포옹
이상화 vs 고다이라 나오

스피드스케이팅 역사상 이토록 따뜻하고 아름다웠던 라이벌이 또 있었을까.
대한민국의 ‘빙속 여제’ 이상화와 일본의 ‘대기만성형 철인’ 고다이라 나오.
두 선수가 빙판 위에서 펼쳐낸 10여 년의 레이스는 단순한 국가 간의 경쟁을 넘어 인간의 한계에 도전하는 과정과 진정한 우정의 가치를 보여주었다.
서로가 있었기에 빙판 위에서 더욱 찬란하게 빛날 수 있었던 두 사람의 라이벌 대전을 돌아본다.

정리. 편집실

천재의 독주와 대기만성의 추격
두 선수의 이력은 시작부터 달랐다. 이상화는 10대 시절부터 세계 무대를 평정한 타고난 천재였다. 강력한 스쿼트 훈련으로 다져진 압도적인 허벅지 근력과 폭발적인 스타트를 앞세워 2010 밴쿠버 동계올림픽과 2014 소치 동계올림픽에서 연달아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특히 2013년 미국 솔트레이크시티에서 열린 국제빙상경기연맹(ISU) 월드컵 2차 대회에서 세운 36초 36의 500m 세계기록은 12년 동안 깨지지 않는 대기록이었다.
반면 고다이라는 꾸준한 노력으로 뒤늦게 빛을 발한 대기만성형 선수였다. 아시아 선수로서는 보기 드문 20대 후반의 나이에 네덜란드로 홀로 유학을 떠났고, 스케이트 날의 위치부터 스케이팅 자세까지 기술적인 부분을 모두 새로 고쳤다. 낮에는 스케이트를 타고 밤에는 해부학 책을 펼치며 자신의 신체 구조에 맞는 주법을 연구한 끝에 서른을 넘긴 나이에 전성기를 맞이했다.
평창으로 향하는 길목, 얼음 위에서 나눈 비밀
국경을 넘어선 두 사람의 우정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었다. 평창 올림픽을 앞두고 여러 국제 대회에서 마주칠 때마다, 두 사람은 국내외 공항이나 기차역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며 안부를 묻곤 했다.
두 선수의 끈끈한 우정은 경기 후 열린 공식 기자회견에서도 잘 드러났다. 고다이라는 “상화는 항상 친절하다”며 과거의 일화를 소개했다. “몇 년 전 서울 월드컵 당시 제가 우승하고 서둘러 공항으로 가야 했는데, 상화가 링크장에서 공항까지 갈 택시를 불러주고 요금까지 직접 내줬다”며 “본인 결과에 아쉬웠을 상황에서도 나를 배려해 주는 마음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고마움을 전했다. 이에 이상화는 “나오와 레이스를 치르며 기분 나빴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화답했다. 이어 “택시 요금은 확실히 내가 냈다”고 재치 있게 덧붙여 회견장을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최고의 장면
두 사람의 라이벌 서사가 정점에 달한 순간은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이었다. 당시 이상화 선수는 무릎 슬개건염과 하지정맥류 부상으로 몸 상태가 온전치 않은 상황에서도 올림픽 3연패라는 부담감을 안고 은반 위에 섰다. 고다이라는 월드컵 15회 연속 우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두며 세계 최강자의 타이틀을 쥔 채 강릉 스피드스케이팅 경기장에 들어섰다.
경기 결과 고다이라 선수가 36초 94의 올림픽 신기록으로 금메달을 차지했고, 이상화 선수는 37초 33의 값진 기록으로 은메달을 획득했다. 레이스가 끝난 뒤, 그동안 참아왔던 신체적 통증과 홈 관중의 뜨거운 응원에 따른 부담감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이상화에게 고다이라가 다가갔다. 고다이라는 이상화 선수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한국어로 “수고했어”라고 다정하게 말했다.
이때 고다이라는 이상화에게 “나는 여전히 너를 존경한다”는 말을 건넸고, 이상화 역시 “멋진 레이스를 보여주고 나보다 더 좋은 기록을내주어 고맙다”고 답했다.
서로의 힘든 훈련 과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유일한 동반자이자 라이벌만이 나눌 수 있는 진심 어린 위로였다. 이 포옹 장면은 국경을 넘은우정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평창 올림픽 최고의 명장면으로 많은 이들의 기억에 남아 있다.
빙상장을 녹인 국경 없는 우정

이들의 우정은 트랙 밖에서도 계속되었다. 서로 다른 국적과 역사적 긴장감 속에서도 두 사람은 늘 서로를 존중했다. 이상화는 평소 고다이라를 향해 “나의 성장을 이끌어준 최고의 경쟁자”라며 경의를 표했고, 고다이라는 “상화가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있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은퇴 이후에도 이어졌다. 2022 베이징 동계올림픽 당시 방송사 해설위원으로 참여한 이상화가 고다이라 선수의 경기를 중계하며 눈물을 흘린 일은 널리 알려져 있다. 당시 고다이라는 발목 부상 여파로 500m 17위에 머물렀고, 이상화는 "왕관의 무게를 견뎌야 했던 마음이 느껴진다"며 눈물을 흘렸다. 소식을 접한 고다이라는 취재진 카메라를 향해 한국어로 "상화, 울지 마"라며 위로를 건넸다.
승부의 세계에서 싹튼 두 사람의 우정은 승패를 넘어선 스포츠의 참된 가치를 보여준 아름다운 사례로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