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설운동장
낡은 폐허가 아닌
‘오래된 미래’를 위하여

발터 벤야민은 ‘빛의 도시’ 파리에서 화려함 뒤에 반드시 쇠락이 존재한다는 진실을 발견했다.
이 진실은 한국의 도시에서도 반복되어, 과거 시민들의 의지를 상징하던 운동장들이 이제 낡고 소멸할 위기에처해 있다.
그러나 오래되었다는 사실이 사라짐의 명분이 될 수는 없다.
운동장은 급변하는 도시 속 시민들의소중한 안식처이자, 다음 세대를 위해 보존해야 할 미래의 공간이기 때문이다.

글. 박해남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도시 발전의 상징에서 철거의 대상으로
1986년 9월 20일, 대한민국 첫 메가이벤트인 제10회 아시안게임의 막이 올랐다. 장소는 잠실 서울올림픽주경기장이었다. 1925년 동대문운동장과 1960년 효창운동장을 대체하고자 1970년대부터 정부와 서울시가 야심 차게 준비한 결과물이었다.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주경기장과 2만 명을 수용하는 체육관을 포함한 이 거대한 경기장은, 전쟁과 가난의 고통을 딛고 아시아의 거인으로 변해가고 있는 한국의 수도 서울을 30억 아시아인들의 눈에 각인시켰다.
1932년. 발터 벤야민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파리로 향한다. 그는 그곳에서 『아케이드 프로젝트』를 집필하며, 파리가 세계의 거인으로 변모하던 시절을 탐구한다. 19세기 초 파리는 눈부시게 발전한 산업과 기술이 문화와 예술을 찬란하게 하였던 ‘빛의 도시’였다. 철골과 유리 지붕 아래 화려한 쇼윈도가 늘어선 ‘아케이드’는 그 정점이었다.파리에 도착한 벤야민의 눈을 붙잡은 것은 아케이드의 쇠락이었다. 19세기 후반 등장한 봉마르쉐, 쁘렝땅, 갤러리 라파예트 등의 백화점에 밀려 아케이드는 쇠락을 거듭하고 있었다. 그는 이 아케이드로부터 하나의 진실을 읽었다. 근대 도시라는 시공간을 사는 우리들의 눈앞에는 무언가가 빛나고 있지만, 화려한 것들 뒤에는 쇠락하는 무언가가 존재하며, 아무리 눈부시게 빛나는 것들도 쇠락을 피하지 못한다는 것. 이것이 그가 읽어낸 역사의 진실이었다.
이 역사의 진실은 우리가 처한 시공간에서도 목격된다. 오랜 시간 ‘서울운동장’으로 불리던 동대문의 운동장은 잠실에 위치한 새 운동장에 ‘서울’이라는 칭호를 내준 후 쇠락을 거듭했다. 이윽고는 조명탑 하나만을 남긴 채 빛나는 유선형의 건물 아래로 사라졌다. 한국의 성장을상징하던 잠실의 운동장도 쇠락을 피할 수 없었다. 오래되고 낡아 제대로 활용될 수 없다는 이야기는 일찍부터 제기되었다.
서울시는 쇠락한 운동장을 바꾸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2007년부터재개발 계획을 구체화해 왔으며, 아시안게임 후 40년이 흐른 2026년에는 새로운 돔구장과 컨벤션 센터, 호텔이 들어설 예정이다. 주경기장만이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의 개·폐회식을 치렀다는 상징성으로명맥을 유지하게 되었다. 지방 도시의 상황도 비슷하다. 1960년대와1970년대 대전, 대구, 전주, 인천, 광주, 부산 등지에 들어선 운동장들은 시민 성금이 모여 만들어진 소중한 자산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들어 신시가지 위주로 도시가 재편되면서 구도심의 운동장들은 ‘낙후된 공간’으로 치부되기 시작했다. 2002년 월드컵을 기점으로 신축 경기장들이 들어서자 기존 운동장들은 축구 전용구장이나 야구장으로용도가 변경되거나 리모델링의 압박을 받게 되었다.



푸른 잔디와 나무를 찾기 어려운
구도심에서 붉은 트랙을 갖춘 운동장은
더욱 소중하다. 운동장 옆
테니스장과 수영장 역시 마찬가지다.
오래된 구도심은 오히려
미래의 가능성을 품은 공간이다.
운동장, 미래를 위한 안식처로 남아야
2000년대에 들어서며 경기장과 그 주변은 급격히 쇠락했다.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신시가지와 신도시들은 고층 빌딩과 아파트, 녹지 공간을 통해 도시의 발전을 과시했다. 한때 번영을 구가했던 ‘구도심’은 낮은 집과 건물, 좁은 도로 가득한 회색 공간으로 여겨지며 소외되었다. 2002년 월드컵 경기장 건립 부지가 신시가지 주변으로 결정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후 쇠락한 경기장은 문제시되었고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대구 시민운동장과 인천 도원경기장은 축구 전용구장이 되었고, 광주 무등경기장과 대전 공설운동장, 마산 종합운동장은 야구장으로 탈바꿈했다. 성남시는 야구단 유치를 위해 종합운동장 리모델링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오래되고 낡았다는 말이 반드시 변화의 당위성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소음과 매연에 지친 이들에게 운동장은 빌딩 숲 사이에서 몸과 마음을 회복하는 안식처다. 이웃과 만나 걷고 뛰며 소통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푸른 잔디와 나무를 찾기 어려운 구도심에서 붉은 트랙을 갖춘 운동장은 더욱 소중하다. 운동장 옆 테니스장과 수영장 역시 마찬가지다.
오래된 구도심은 오히려 미래의 가능성을 품은 공간이다. 7,80년대 발전과 풍요를 보여주던 신도시 아파트들은 낡고 오래된 것이 되었다. 5층에서 시작된 아파트는 30층을 거쳐 50층을 향하고 있다. 그러나 이 아파트들도 언젠가 쇠락할 것이며, 100층, 200층으로 무한히 높아질 수도 없다. 낮고 작은 건물들이 가득한 구도심에서 삶을 영위하는 이들에게 운동장은 소통의 공간이자 안식처이고 삶을 계속할 이유를 제공한다.
발터 벤야민은 파리의 아케이드에서 산책하는 이들을 발견했다. 빠르게 발전하는 도시에는 속도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눈에는느린 속도로 이동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이들이야말로 도시를 살아가는 인물의 전형이었다. 화려함 뒤에 쇠락이 있다는 역사의 진실이 변치 않듯, 빠르게 지나가는 것들 사이에는 느리게 걷고 뛰는 이들이 있다는 사실도 변하지 않는다. 공설운동장과 시민운동장들은 화려한 건축물을 위해 사라지기보다, 도시의 속도를 늦추고 시민의 삶을 보듬는공간으로서 계속 존재해야 한다.

글을 쓴 박해남은 계명대학교 사회학과 교수이며, 한화 이글스의 팬이자 리버풀FC의 팬이다. “스포츠를 아는 지식은 사회를 아는 지식이다”라는 사회학자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말에 감명받아 스포츠를 통해 동아시아의 도시와 사회를 파악하고자 노력해왔다. 역사와 도시사회학을 주 전공으로 삼아 글을 읽고 쓰고 있으며, 얼마 전 『1988 서울, 극장도시의 탄생』이라는 책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