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 거대한 시설이 아니라
다양성이 꽃피는 공공재로

20세기의 경기장은 오직 경기만을 위해 건설되고 활용되었다.
그러다 보니 경기가 없는 날에는 문을 닫아 도심 공동화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서며 경기장은 새로운 가치를 품기 시작했다.
단순히 판매 시설을 입점시켜 임대료 수익을 올리는 데 그치지 않고, 스포츠와 문화,사회적 이벤트가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탈바꿈하고 있다.
이제 경기장은 시민을 위한 ‘문화적 공공재’다. 그 현황과 가능성을 살펴본다.

글. 정윤수 성공회대학교 문화대학원 교수

닫힌 경기장에서 열린 문화공간으로
수십 년 동안 지하철 4호선을 애용해왔다. 서울 북부 ‘노도강(노원·도봉·강북)’에서 살았기에 지금도 지하철하면 4호선부터 떠오른다. 역 이름을 순서대로 다 외울 정도다. 그중에서도 “아, 나의 사랑 동대문운동장역!” 지금은 이름이 바뀌어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이 되었지만 여전히 나는 누군가에게 약속 장소를 알려줄 때 동대문운동장역에서 2호선 갈아타면 된다고 말한다.
오랫동안 그 역을 이용하며 야구와 축구를 보러 다녔다. 경기가 열리기 전에 평화시장 쪽 헌책방을 구경했고, 경기가 끝나면 뜨끈한 잔치국수를 먹었다. 2007년 12월 18일까지 그랬다. 그 후 기억 속의 동대문운동장은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가 들어섰다. 오해는 마시라. 동대문운동장에 대한 회고와 낭만의 감상일 뿐이다. DDP는 그 자체로 한국 건축의 발전과 동대문 지역 상권 유지 및 디자인 문화 발전에 기여해왔다.
다만 어떤 상상을 해보는 것이다. 만약 DDP가 아니라, 옛 동대문운동장을 과감히 리노베이션해서 축구와 야구를 품은 공간이자 다양한 문화적 요구까지 수용하는 복합 스포츠공간이 되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주중과 주말에 경기가 펼쳐지고, 전국의 팬들이 경기전후로 동대문 일대 상권을 방문하는 풍경,방탄소년단 같은 세계적인 스타들의 공연이이어지는 풍경을 상상해보자. 리모델링된 동대문운동장이라면 각종 스포츠와 엔터테인먼트 메가이벤트를 충분히 담아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전통 시장, 첨단 패션, 문화유산 등 동대문 일대의 다양한 문화 요인이 서울 중심가의 폭발적인 욕망을 아름답게 수용했을지도 모른다.
현재 전 세계 주요 도시의 경기장 프로젝트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추진되고 있다. 손흥민 선수가 활약했던 런던의 ‘토트넘 홋스퍼 스타디움’은 경기가 없는 날 첨단 시설을 동원해 순식간에 거대한 공연장으로 탈바꿈한다. 이곳에서는 오는 7월 6일부터 7일까지 양일간 방탄소년단의 공연이 열릴 예정이다. 이미 전석 매진되어 무려 12만 명의 관객이 입장을 앞두고 있는데, 이는 토트넘 경기장 단일 공연 사상 최고 객석 점유율이다. 이처럼 도심 경기장이 복합 문화 공간으로 활발히 활용되는 것은 수익과 공공성, 그리고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마땅히 나아가야 할 방향이다.
리노베이션을 통한 생존 전략
이제 우리 얘기를 해보자. 서울을 포함한 전국의 주요 도시들은 20세기 후반 도시 팽창 과정에서 원도심 내에 공설운동장을 빠짐없이 지었다. 그러나 이제는 노후시설이 되어 경기 외의 콘텐츠를 담아내지 못하면서 도심 공동화와 슬럼화를 겪고 있다. 이러한 시설에대한 과거의 기준이나 조례를 획기적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경기장에 녹아 있는 시민들의 추억과 역사를 온전히 품으면서도 새로운 시대의 요구를 수용하기 위한전략이다. 실현 과정에서 반드시 대규모 증·개축을 할 필요는 없다. 중소도시의 특성에 따라 1만 명 규모로도 충분한 효과를 볼 수 있다. 나머지 부지나 시설은 낙후한 지역의 문화 인프라로 공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한편, 2002년 월드컵을 계기로 전국 주요 도시에 거대한 경기장들이 신축되었다. 전국 10개 도시 경기장 건설에 투입된 비용만 약 1조8,100억 원에 달하며, 이후 관리 운영비 또한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일부는 수지 타산을 맞췄으나, 수년째 국가대표 경기를 유치하지 못하거나 규모가 너무 커 지역 연고 구단이 전용 경기장으로 이동한 사례도 있다.
도심 부지를 확보하지 못해 외곽에 세워진 탓에 주변 상권이 전혀 형성되지 않은 곳도 존재한다. 이제 이 공간들을 대대적으로 재생해야 한다. 서울월드컵경기장처럼 대형 할인점이나 영화관 등으로 수익을 창출하거나, 인천문학경기장 또는 인천SSG랜더스필드 사례처럼 프로구단이 운영 및 유지 보수 권리를 양도받고 지자체와 수익을 나누는 방식 등 적극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삶의 기억이 머무는 경기장
경기장에 단순히 예식장을 유치하는 식의 활용은 한계가 명확하다. 주말 낮 하객들만 잠시 머물다 떠나는 공간은 지역주민들에게 삶의 소중한 ‘장소’로 인식되기 어렵다. 우리의 상상은 훨씬 더 멀리 펼쳐져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부대시설이나 다양한 활용도가 아니라, 경기 그 자체다. 경기장은 경기를 위해 존재한다. 선수는 최상의 조건에서 뛰어야 하고, 관중은 쾌적하고 안전하게 관람해야 한다. 지역 팬들이 그들의 열망을 마음껏 표출할 수 있는 곳이어야 경기 없는 날에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이를 위한 절대적 관건은 해당 팀이 경기장을 전적으로 책임지는 것이다. 구단이 설계 단계부터 다목적 활용 방안을 직접 기획해야 경기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체계적인 사업 운영이 가능하다. 2028년 완공 예정인 ‘스타필드 청라’는 돔구장과 복합 쇼핑몰, 호텔이 결합된 세계 최초의 형태로, 야구 경기를 위한 설계를 기본으로 하되 쇼핑과 공연 수요까지 창출하도록 계획되었다. 기존 경기장 역시 활로를 찾기 위해서는 지자체가 지역 연고 클럽 및 팬들과 소통해야 한다. 필요하다면 조례를 고쳐서라도 다양한 주체가 주인 의식을 갖고 경기장을 활용할 수 있게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경기장이 시민의 소중한 ‘공공재’라는 것은 시민들이 단순한 관중을 넘어 지역 사회의 주체로서 다양하게 참여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글을 쓴 정윤수는 성공회대 문화대학원 교수이며, 2002년 월드컵 전후로 하여 스포츠 칼럼과 축구 해설을 해왔다. 스포츠 인권 향상과 스포츠 도시 실현에 관한 연구와 활동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