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과 반성 그리고 변화

스포츠는 생물이다. 살아서 꿈틀거린다. 120여 년 전 근대 올림픽의 창시자 피에르 드 쿠베르탱(Pierre de Coubertin)은 스포츠의 본질을 ‘진보에 대한 욕망과 위험에까지 이를 수 있는 근육질의 노력에 대한 자발적인 숭배’라 정의했다.
인류의 역사가 모순을 잉태하고 구(舊)체제를 극복하며 발전하듯 스포츠도 진화한다. 사회· 문화적 현상으로 정치·경제적 영향력이 확장된 스포츠는 인간의 욕망이 소멸되지 않는 한 분출되는 용암처럼 쉼 없이 끓어오를 것이다. 2025년엔 무엇이 폭발했는가. 모순은 또 무엇이었나. 성찰과 반성, 변화의 순간을 포착한다.

글. 최동호 스포츠평론가

아직도 용서가 안 되십니까?

10월 14일 파라과이전 22,206명, 11월 14일 볼리비아전 33,852명, 11월 18일 가나전 33,256명. 2025년 열린 A매치(국가 간 축구 A팀 경기) 관중 수가 급감하며 ‘흥행 참사’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한 언론은 썰렁했던 서울월드컵경기장 2층 관람석 사진을 보여주며 ‘아직도 용서가 안 되십니까’라고 물었다. ‘흥행 참사’의 원인을 ‘홍명보 파동*’에서 찾은 것이다. 크게 빗나간 것 같지는 않다. 조금 더 들여다보자. 직전 해인 2024년 내내 대한축구협회는 헛발질이었다. 팬과 소통할 수 있는 ‘팬 페스타(Fan Festa)’ 개최, 공개 훈련 확대, 혁신위원회 조직 등 다양한 시도를 했지만 겉핥기식 개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토록 팬들과 격리돼 있다니. 협회의 윤리성과 공정성을 의심하며 협회 노조마저 등을 돌렸다. 그리고 1년. 텅 빈 관람석은 여전히 불신이 가득한 팬심을 보여준다. 인터넷 시대의 스포츠 팬은 영리하다. 정보의 바다에서 협회보다 빠르게, 언론보다 정확하게 정보를 수집한다. 팬덤의 강력함을 잘 알고 있고 집단 행동으로 팬심을 표현한다. 이젠 가린다고 가려지는 세상이 아니다. 텅 빈 관람석은 체육 단체도 변하지 않으면 지지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협회는 공정하라. 그리고 민주주의 원칙에 충실하라.


* 2024년 국가대표팀 감독이 홍명보로 교체되며 불거진 내정자 논란을 말한다.
“여성 스포츠는 보호받아야 한다”

빠르면 2026년 트랜스젠더의 올림픽 참가가 금지된다. 중대한 패러다임의 변화다. 국제올림픽위원회(International Olympic Committee, IOC)는 2004년 스톡홀름 합의를 통해 트랜스젠더의 올림픽 참가를 허용했다. 수술을 통해 자신의 성별을 직접 선택한 이들을 포함함으로써 성평등에 가까워진 것이다. 그러나 생물학적, 의학적, 스포츠적으로도 인정할 수 있는 포괄적인 성 구별 기준 마련이 쉽지 않았기에 트랜스젠더의 올림픽 참가는 늘 논란거리였다. 2015년 남성 호르몬 테스토스테론의 혈중농도를 여성 경기 참가의 새 기준으로 내세웠지만 이 역시 허점투성이였다. 2021년 IOC는 은근슬쩍 트랜스젠더의 참가 결정권을 종목별 단체에 넘겨버린다. 그리고 이어진 중대한 변화, 최초의 여성 IOC위원장이 탄생한다. 커스티 코번트리(Kirsty Coventry)는 “여성 스포츠는 보호받아야 한다.”고 선언했다. 이전까진 트랜스젠더의 경기 참여가 인권적 관점에서의 여성 스포츠 보호였다. 그러나 여자복싱에서 트랜스젠더의 펀치를 맞은 선수가 경기를 포기하고 여자배구에선 트랜스젠더의 스파이크를 맞은 선수가 기절했다. 육상과 수영, 역도에선 트랜스젠더의 기록이 월등하다. 여성으로 인정받지만 남성의 신체 능력을 발휘하는 것이 문제였다. 트랜스젠더의 경기 참여가 여성 스포츠 보호인가? 파괴인가? IOC는 제 나름대로 결론을 내린 것 같다.

“강하게 잡아채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이 무슨 일인가’. 2025년 11월 인천국제마라톤대회에서 불거진 성추행 논란 말이다. 이수민 선수가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자 김완기 감독이 달려와 타월로 덮어주려고 했고 이수민 선수는 강하게 밀쳐내며 거부했다. 감독은 선수를 안으려고 했고 선수는 감독을 밀어냈다. 성추행 논란이 일었다. 논란이 거듭되자 이수민 선수가 입장을 밝혔다. “성추행이라고 주장한 적 없다”. 이수민 선수는 골인 직후 강한 신체 접촉으로 극심한 통증을 느낀 것이 문제의 본질이라고 밝혔다. 과거라면 선수가 감독을 밀쳐내는 건 상상할 수 없었다. 변했다. 선수들은 의사 표시를 한다. 감정을 표현하고 의견을 개진한다. 감독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42,195km를 완주해 기진맥진한 선수를 무턱대고 타월로 덮는 저 장면은 너무 우악스럽지 않은가. 잠시 숨 고를 여유라도 줬다면, 강제스럽지 않게 감싸줬다면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이 전해졌을 텐데……. 지나치게 기계적이었다. 스승의 스승 때부터 배워 온 그대로이지 않은가. 시대가 변하면 선수도 팬들도 변한다. 지도자도 변해야 한다. 변하지 못하면 뒤처진다.

그래도 조금씩 발전하고 있다

2025년에도 갈등은 있었다. 학생 선수의 미래를 위해 학습권을 강조하는 체육 개혁이 있었고 이에 반발해 엘리트스포츠주의자들은 손흥민을 꿈꾸는 학생 선수들의 운동할 권리를 보장하라고 주장했다. 8월엔 중학교 철인3종 선수의 성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혼돈과 혼란. 그러나, 아니 그래도 진일보하고 있다. 인권 분야에선 피해자 구제, 가해자 분리, 신고·접수·상담· 조사의 체계가 갖춰졌고 학생 선수의 학습권·운동권 논란은 논쟁의 과정 속에서 현실 진단과 개혁안이 쏟아지고 있다. 격랑기를 지나면 돛을 올릴 순풍의 시기가 오기 마련이다. 스포츠도 개혁을 멈추어서는 안 될 것이다.

글을 쓴 최동호 스포츠평론가는 《YTN》 기자, IB스포츠 신사업개발팀장, 스포츠문화연구소 소장, 문화체육관광부 3.0위원회 위원, 스포츠윤리센터 심의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다양한 매체에서 스포츠에 대한 논평을 전하며, 스포츠를 통한 정치, 경제, 역사, 문화 탐구를 즐겨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