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의 희노애락을
로 읽다

후견지명이라 해도 상관 없다. 이런 날, 올 줄 알았다. 한화 이글스의 리그 1위! 이젠 한국시리즈 우승을 향한다.
NC의 손아섭까지 데려왔으니, 올해 우리 독수리는 기쁨을 줄 것이다. 기대하며 오늘도 TV 앞에 앉는다.
희노애락의 무한 순환 속으로. 최!강!한!화!를 외치며.

글. 남상우 충남대학교 스포츠과학과 교수

암흑의 시대? 우울의 시대!

한화 이글스(이하 한화)는 1등을 한 적이 많다. 물론 시즌 초에만. 네이버 야구 순위에 한화가 ‘아주 잠깐’ 최정상에 머무는 순간, 그때를 놓치면 안된다. 화면 캡쳐. 지인에게 뿌린다. ‘올해 한화는 달라질 거예요.’라는 기대를 한가득 담아. 기대는 여지 없이 무너진다. 독수리는 누가 말릴 틈도 없이 최하위로 수직 낙하한다. “안녕히 계세요. 여러분~”
1999년 한국시리즈 우승 이후 하위권에서만 놀던 한화는 ‘꼴칰1)’ 이란 별명을 얻었다. “우린 닭 아니고 독수리라고!” 아무리 외쳐도 소용없었다. 우리 스스로도 그 별명을 인정했고, 관중석에서 외치는 ‘최강한화!’ 구호는 허무했다. 선수들마저 듣기 죄송했단다. ‘현실’이 아닌 ‘희망’을 외치니. 수많은 레전드 감독들에게 희망을 걸었으나 실망만 반복되었다. 사람들이 말했다. ‘암흑의 시대를 걷는다’. 아니다. 암흑의 시대엔 희망을 못 본다. 우린 희망을 계속 봤다. 우리가 괜히 ‘최강한화’를 외쳤겠는가? 하지만 그런 희망이 잡히지 않을 때 사람들은 우울해진다. 한화는 ‘우울의 시대’를 걸어왔다.

나는 행복합니다! 졌·잘·싸니까!

우울의 시대에도 팬들이 위안 삼은 건 ‘미래자원’이었다. 리그 꼴찌에게 부여한 신인드래프트 지명권으로 문동주, 황준서, 김서현, 정우주를 데려왔다. ‘그렇지! 언젠가 이들이 류현진이 될 거야’. 모이를 주며 병아리 키우…(아잇, 닭 아니라니까!) 아기 독수리 키우듯, 팬들은 “나는 행복합니다”를 외치며 관중석을 지켰다. 팀이 꼴찌여도 관중 점유율 1위를 차지한 건 우울을 이겨내려는 ‘행복 코스프레’, 즉 ‘슬픔의 연대’ 덕이었다. 슬픔은 이탈이 아닌 연대의 자원이었다. 실망과 슬픔은 한화 팬덤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 감정이었던 것이다.
팬으로서 한화에 느낀 노여움과 슬픔은 단순히 성적 때문만은 아니었다. 누구도 경기 결과를 통제할 순 없다. 꼴찌? 할 수 있다. 허나 통제할 수 있는 걸 안 하면 화를 부른다. 통제 가능한 건 ‘지금의 플레이’뿐. 희망을 놓지 않던 우리에게 한화가 준 실망감은 무성의한 플레이에서 나왔다. ‘어차피 또 질텐데’라는 패배주의. 팬들은 관중석에서 ‘최강한화’를 외치는데, 선수들은 경기장에서 ‘체념한화’를 시연한다. 2016년 김성근 전 감독이 그 패배주의를 없애겠다고 펑고 날릴 때 우리가 환호한 이유다. 졌지만 잘 싸워주길 희망했던 게다.

이제는 행복야구 할 때다!

‘졌잘싸2)’도 한두 번이지. 팬들의 처절한 희망을 매년 배신한 독수리. 팬들이 겪은 건 희망고문이었다. 시즌 초, 봄야구에 설레다, 여름에 포기, 가을엔 다음 시즌 기대. 감정의 고문. 어느새 우리에게 야구장은 ‘관람’이 아닌 ‘수행’ 공간이 되었다. 인내의 수행. 한화 팬이세요? 우리 기업에서 모시겠습니다. 어떤 일도 참을성 있게 하실 것 같네요. 응원 중 팔을 올렸는가? ‘부처 핸즈업’이다. ‘최강한화’ 육성 응원? ‘무적엘지’로 응수! 미운 LG 트윈스. 한국 시리즈에서 보자.
‘모나미’ 문구 회사가 2023년 LG 트윈스 우승 후 트윈스 특별판 펜을 제작한 적이 있다. 그 펜을 보며 희망해왔다. ‘언젠가 독수리 특별판 펜이 나오리라’, ‘우리도 행복야구 할 때가 오리라’. 그리고 그때가 왔다. 지금 한화 팬들은 ‘즐거움’을 넘어 ‘희열’을 즐기는 중이다. 2025년 8월 1일 기준 리그 1위. 2위와 두 게임 차이지만, 이렇게 야구 볼 맛이 났던 때가 언제였던지. 과거, 한화 팀 저지를 입고 다니면 ‘애잔하다’라는 눈빛을 받았다. 지금은 ‘부럽다’는 시선을 받는다. 원정 경기 갈 땐 집에서부터 한화 유니폼을 입고 나간다. 그래, 행복야구라는 건 이런 거다.

스포츠가 주는 희노애락의 본질

문득 궁금하다. 한화가 내게 해준 것도 없는데, 난 왜 그들의 성적에 일희일비할까? 단지 내가 대전에 오래 살아 온 것과 한화가 대전을 연고로 둔 것 외에는 연결고리가 없지 않은가? 스포츠가 주는 감정적 마법이 여기에 있다. ‘팀 정체성’이란 마법. ‘나는 대전 시민이다 = 대전은 한화 이글스를 대표 야구팀으로 한다 = 고로, 한화 이글스는 나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을 대표할, 그래서 동일시할 대상을 찾는다. 스포츠는 그런 본능을 제도화한 발명품이다. 학교 동일시(학교 운동부), 지역 동일시(지역 프로팀), 국가 동일시(국가 대표팀) 등, 동일시하면서 나는 팀이 되고, 팀은 내가 된다. 팀이 진다? 내가 지는 것이다.이것이 스포츠의 본질이다. 스포츠란 ‘확실한 불확실성’으로 제도화 된 대중문화다. 불확실하기에 과정은 감정적이고 서사적이 된다. 그 감정과 서사에 동의하며 우리는 희노애락의 무한 순환에 빠진다. 한화 팬의 삶은 바로 이 스포츠가 선사한 감정의 순환을 온몸으로 이겨낸 여정이다. 기나긴 패배의 시간 속에서 분노하지만, 새 감독의 첫 경기에 열광하고, 유망주의 멀티히트에 환호하며, 불펜이 무너지면 슬퍼한다. 스포츠가 제공하는 ‘희’와 ‘노’, ‘애’의 감정 연쇄. 그리고 2025년, 한화는 드디어 그 끝의 ‘락’에 도래했다. “락(樂) will never die.”

1) ‘꼴찌 하는 치킨’의 줄임말로, 독수리를 치킨으로 격하해 칭하는 불명예의 증거인 셈이었다.
2) ‘졌지만, 잘 싸웠다’의 줄임말
글을 쓴 남상우는 스포츠사회학자다. 스포츠사회학이 재미있어 공부했고, 지금도 재미있어 하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한국스포츠과학원 선임연구위원이었다가 2021년부터 충남대학교 스포츠과학과 교수로 근무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