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에 열광하는 ‘한’ 민족
식민지의 억압 속에서 우리 국민은 ‘스포츠’를 통해 결집했다. 국제대회에서 선수들의 활약은 민족 자긍심을 일으켰고, 민족 정체성과 유대감을 더욱 견고하게 만들었다. ‘한민족’을 하나로 만든 스포츠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글. 정희준 문화연대 집행위원

원래 조선 백성은 뛰지 않았다. 워낙 먹을 것이 궁한 시절이라 끼니를 때우고도 살살 걸어 다녀야 했다. 아이들이 뛰어다니면 할머니들이 “배 꺼진다. 뛰지 말아라.”라고 채근할 정도였다. 끼니 걱정 없던 양반도 뛰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신기선(1851~1909년)이란 대신이 있었다. 어느 여름날, 미국 영사는 조선의 관료들에게 테니스라는 운동을 선보이고자 했다. 스포츠의 즐거움을 소개하여 함께 즐기고자 했을 터이다. 그러나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다니는 서양인들을 신기선은 이렇게 나무랐다. “아니, 아랫것들 시키지 왜 직접 뛰어다니시오.” 온 백성 모두, 뛰면 안 되는 시절이었다.
개화기에 접어들면서 변화가 왔다. 근대적 조선, 강한 조선인을 만들기 위해선 당연히 뛰어야 했고, 또 이겨야 했다. 1895년 체조가 학교 교과목에 포함된 이후 축구, 야구, 정구가 보급되기 시작했다. 1896년 『독립신문』은 사설에서 “조선이 암만 하여도 나라가 되겠다.”라며 학생들을 칭찬하는데, 이유는 우리 학생들이 일본 학생보다 축구를 ‘백배’ 잘하기 때문이었다.어느덧 스포츠는 근대화의 상징이 되었다. 1920년 『개벽』은 「사나이거든 풋볼을 차라」에서 조선인은 어렸을 때부터 업혀 길러지는 데다 꿇어앉는 습관 때문에 다리가 짧고 양복을 입어도 폼이 안 나는데, 축구를 해야 다리가 길어지고 튼튼해진다고 했다. 단재 신채호는 “덕, 지, 체 삼육에 ‘체육’이 최급”이라면서 체육을 가장 중시했다. ‘조선 체육의 아버지’ 여운형은 1933년 한 권투 대회 개회사에서 “피 흘리면서도 싸우고 다운돼도 다시 일어나 싸우는 권투정신은 청년들이 본받아야 할 훌륭한 정신”이라며 “씩씩하게 스포츠맨쉽으로 싸우라.”라고 당부했다.
조선이 근대에 눈을 뜨게 되면서 ‘스포츠맨’은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최고의 스타는 1936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한 손기정과 ‘자전차대왕’ 엄복동이었다. 특히 엄복동은 일본 선수들을 누르고 우승했고, 또 일본인들이 복수를 다짐하며 최고의 선수들을 데려오면 이마저 눌러버려 “역시 엄복동!”이라는 말이 유행하게 됐다. 십만 명에 달하는 관중에게 ‘강한 조선’을 확인케 한 조선민족 불세출의 스타였다. 1947년, 그러니까 해방 후 정부가 수립되기 전, 서윤복과 남승룡이 보스턴마라톤에 출전했다. 이름도 모르는 나라에서 온 이방인 서윤복은 세계신기록으로 우승했다. 감독 손기정, 이들을 재워준 보스턴 교민 백남용과 함께 부둥켜안고 울었다. 당시 뉴욕에 머무르던 훗날의 초대 상공부장관 임영신은 이들과 뉴욕에서 LA까지 40여 일에 걸친 교민방문 행사에 나섰다. 특히 워싱턴의 호텔에서 열린 우승 축하연은 당시 뼈저리게 겪었던 약소국의 서러움을 날려버리는 감격적인 행사였다. 당시 한국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약소국이어서 대사관에서 미국 인사나 외교사절을 초청하면 도무지 오질 않았었다. 그러나 서윤복 우승기념 축하연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와서 행사장이 미어터졌다. 이역만리 타향살이의 서러움을 서윤복이 ‘한방’에 날려준 것이다.
한국전쟁의 상처가 가시지 않은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는 프로복싱이었다. 1960년 국제무대 최초의 ‘챔피언’이 탄생했다. 주니어미들급 동양챔피언 강세철. 서울야구장 특설링에서(지금 동대문디자인플라자 자리. 이때는 국내에 실내체육관이 없었다.) 강세철은 필리핀의 러시 메이욘을 5회 KO로 누르고 챔피언이 된다. 그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당대 최고의 영화배우 도금봉과의 스캔들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이런 강세철을 누르고 결국 세계챔피언에 오른 선수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기수다. 그는 열두 살 나이, 1·4후퇴 때 남으로 넘어온 피난민이었다. 양담배와 신문을 팔고 구두닦이를 하며 엿판 메고 엿장수도 했던 그는 중학교 시절 육상과 씨름을 했는데 복싱으로 종목을 바꾸며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땄다. 프로에 데뷔해 강세철에게 승리한 후 일본 선수를 KO로 때려눕히고 동양챔피언에 올랐다. 일본인들이 서양 선수들을 메다꽂은 프로레슬러 역도산에게 열광했듯 한국인들은 일본 선수를 때려눕히고, 서양인과 싸워 이긴 김기수에 열광했다.
식민경험과 군사독재가 뒤엉킨 ‘20세기 대한민국’에 스포츠가 우리를 뭉치게 하고, 민족적, 국가적 자부심을 갖게 했을 뿐 아니라 IMF 경제위기 같은 어려운 시기에 온 국민에게 위안을 주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먹을 것도 없고 즐길 거리도 없던 시절 (정말 가난했고, 아무것도 없었다!) 스포츠는 특별했으며 국민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산업화 초기였던 1970년대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명했던 사람은 대통령 박정희와 프로레슬러 김일이었다. 1976 몬트리올올림픽에서 레슬링의 양정모가 해방 이후 첫 금메달을 목에 건 뒤 몬트리올에 애국가가 울려퍼지며 태극기가 올라가던 일요일 아침은 ‘엄숙한 감격’의 순간이었다.
1980년대는 한국 스포츠의 황금기였다. 우리 스포츠 역사상 최고의 스타는 단연 차범근이다. 대한민국을 유럽에 알린 최초의 인물도 독일 분데스리가에서 ‘차붐’으로 불리던 그였다. 1986년 아시안게임에 이어 개최한 1988 서울올림픽은 민족의 한풀이였을 뿐아니라 대회 캐치프레이즈 ‘세계는 서울로, 서울은 세계로’가 지시하듯 대한민국 세계화의 시작이었다. 결국 1990년대 박세리, 박찬호, 지금의 손흥민으로 이어진 우리의 스포츠 역사는 힘들었던 과거에 대한 콤플렉스를 날려버리고 국가적 자부심을 우리에게 공급했던 원천이었다.
BTS, 블랙핑크의 전지구적 인기가 신기하기만 하고,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아카데미 등 세계적 영화상을 휩쓸어 우리를 놀라게 하더니, 한강이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고, 이제는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이 권위 있는 토니상을 휩쓸었다. K-푸드, K-뷰티가 전 세계인의 취향과 욕망마저 사로잡는, 그런 놀라운 시대를 우리는 걸어가고 있다. 이러한 K-컬처 글로벌 열풍의 시작은 바로 스포츠 아니었을까. 가난하고 우리에게 아무것도 없던 시절, 유일한 기쁨이었고 민족적 자부심을 안겨준 마르지 않는 샘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