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가 보여준 희망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던 시대, 태극마크를 단 채 땀 흘리는 선수를 보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두 손을 모으는 사람들.
마침내 우리 선수가 두 손을 번쩍 들어 올리며 결승선을 1위로 통과하자 그를 향해 우레와 같은 함성이 쏟아진다. 그가 전해준 건 기쁨과 환호와 더불어 ‘우리도 할 수 있다’라는 희망이었다. 스포츠로 슬픔을 이겨냈던 그 시절의 감동은 여전히 우리 가슴 속에 있다. 그 힘으로 우리는 내일을 향해 다시 나아간다.

광복 80주년, 스포츠의 힘으로 일어서다

민족성을 억압하려 스포츠 활동을 제한했던 체육계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수난사와 궤를 같이 한다. 그럼에도 민중들은 스포츠 활동의 꽃을 피웠다. 빼앗긴 들에서도 싹을 틔웠던 한국 스포츠의 역사를 짚어 본다.

글. 하웅용 한국체육대학교 교수    사진제공. 손기정기념관, 서윤복사업추진위원회

어둠 속에서도 운동장은 빛났다

일제강점기, 나라를 잃은 백성들은 자신의 이름조차 숨죽여 말해야 했다. 학교에서는 조선어가 사라졌고 거리에서는 태극기를 감히 꺼낼 수 없었으며 민족의 정체성마저 지워져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암흑 속에서도 사람들은 저마다 희망의 숨통을 틔울 무언가를 찾고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운동장’이었다.
1920년, 조선체육회가 창립되었고 제1회 전조선야구대회가 열렸다. 단순한 스포츠 경기가 아니었다. 야구공 하나에 담긴 것은 민족의 자존심이었고, 그라운드 위의 질주는 이름을 되찾고자 하는 뜨거운 외침이었다. “우리는 단순히 야구를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운동장 위에서 민족을 지키고 있다.” 이 말은 단지 선언이 아니라, 억눌린 민족이 몸으로 쓴 또 하나의 독립운동이었다.
그 믿음은 꺾이지 않았다. 1936 베를린올림픽,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마라톤 출발선에 한 조선 청년이 섰다. 손기정. 그는 자신의 국기를 달 수 없었고, 가슴에는 일장기가 붙어 있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는 조국의 태극기가 가슴에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결승선을 향해 내달렸고, 결국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러나 시상대 위에서 그는 웃지 못했다. 태극기는 없었고, 애국가는 울리지 않았다. 그가 흘린 눈물은 혼자의 것이 아니라 민족 전체의 것이었다. 그 눈물은 억압과 분노, 동시에 희망과 의지를 담은 무언의 외침이었다. 동아일보는 그의 사진에서 일장기를 지우고 실었고, 일제는 이를 이유로 신문사를 폐간시켰다. 하지만 그날의 이미지는 한국 스포츠사뿐만 아니라 민족사의 영원한 상징으로 남게 되었다. 스포츠도 투쟁이 될 수 있고, 운동장도 독립운동의 현장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었다.

스포츠, 대한민국을 일으키다

광복은 우리에게 빛을 돌려주었지만, 현실은 여전히 척박했다. 세계 앞에서 대한민국은 작고 연약한 존재였고, 미래를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스포츠는 우리를 깨웠다. 1947년, 마라토너 서윤복이 태극기를 달고 보스턴마라톤에 출전했다. 그는 누구도 주목하지 않았던 신생국의 이름을 세계 무대에 각인시켰다. 세계신기록과 함께 결승선을 통과한 그의 발걸음은 ‘대한민국은 존재한다’라는 단호한 증명이었다.
이어 1948년, 아직 정부조차 수립되지 않은 시점에 우리 선수단은 ‘KOREA’라는 이름으로 생모리츠 동계올림픽과 런던 하계올림픽에 참가했다. 선수들은 목숨처럼 태극기를 안고 입장했고, 그들의 눈빛은 메달이 아닌 존재 그 자체를 향해 있었다. 경기장에서 흘린 땀은 대한민국이라는 국가가 세계 앞에서 살아 있음을 드러내는 증언이었다. 그것은 단순한 스포츠의 시작이 아니라, 광복 이후 스포츠가 우리 국민에게 남긴 첫 번째 희망이었다.
1950년, 한국전쟁은 우리에게 커다란 시련을 주었다. 초토화된 땅 위에서 우리는 또다시 시작해야 했고, 스포츠는 그 과정에서 국가 정체성과 존재감을 재건하는 주요 전략이 되었다. 정부는 엘리트 스포츠를 국가 과제로 삼았고, 1966년 개촌한 태릉선수촌은 이 결심을 실현해 낸 상징이었다. 그곳에서 훈련받은 국가대표들은 기적을 바라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기적을 만들어내는 존재가 되어 갔다.
그 변화는 실적으로 이어졌다. 1964 도쿄올림픽에서 장창선이 복싱 은메달을, 1966 미국세계선수권에서는 금메달을 차지했다. 같은 해, 여자농구 대표팀이 체코 세계선수권에서 결승에 진출하며 ‘체코의 기적’ 을 만들어냈다. 이는 여성 스포츠가 보여준 자긍심이었고, 전쟁의 상흔을 딛고 세계에 당당히 맞선 민중의 선언이었다. 이 흐름은 1973년 여자 탁구의 세계 제패로 이어졌고, 1976년 몬트리올에서 양정모가 레슬링 금메달을 목에 걸며 마침내 손기정의 눈물에 대한 응답을 완성했다. 우리는 승리했고, 세계는 주목했다.

손기정 선수가 획득한
1936 베를린올림픽 마라톤대회에서의 금메달

세계 중심에서의 함성을 외치다

1986 서울아시안게임에서 한국은 중국과의 금메달 경쟁 끝에 종합 2위를 차지하며 아시아의 중심 국가로 우뚝 섰다. 우리는 이제 변방이 아니라 중심이었다. 그리고 그 기세를 몰아 19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되었다. 전쟁의 잿더미에서 불과 수십 년 만에, 세계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앞에 감탄했다. 거리에서, 집안에서, TV 앞에서 온 국민이 하나 되어 환호하고 기도하며 올림픽을 함께 했다.
서울의 하늘에 오륜기가 떠오르던 그날, 대한민국은 더이상 과거의 초라한 나라가 아니었다. 특히 여자 핸드볼 대표팀이 강호 소련을 21대 19로 이겨 금메달을 따낸 순간은 단지 스포츠의 승리를 넘어서 국민 모두의 환희였다. 서울올림픽은 단순한 개최 이상의 의미를 가졌다. 그것은 우리가 단결할 수 있다는 증명이자, 전 세계에 문화적 자존을 각인시킨 역사적 사건이었다.

한계를 넘어 환희의 미래로

1990년대 이후, 한국 스포츠는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엘리트 중심의 체육에서 벗어나 모두가 함께 뛰고 즐기는 생활체육의 시대가 도래했고, 국민은 스포츠를 통해 여가와 건강, 공동체의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여정에도 시련은 있었다. 1998년 IMF 경제위기, 모든 국민이 좌절에 빠졌을 때 다시 우리를 일으켜 세운 것은 스포츠였다. 박세리의 맨발 투혼은 삶을 포기하려던 누군가의 등을 떠밀었고, 박찬호의 강속구는 무기력했던 청춘에게 다시 뛸 이유를 주었다.
그리고 2002년, 대한민국은 붉게 물들었다. 한·일월드컵 4강 신화는 국민을 하나로 모았고, 그 함성은 전 세계에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열정과 단결을 각인시켰다. 이후에도 스포츠는 계속 감동을 써 내려갔다. WBC 4강, 베이징올림픽 야구 금메달, 김연아의 피겨 금빛 연기, 이상화·이승훈·모태범의 질주는 겨울 스포츠에서도 우리는 더이상 추종자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2018 평창올림픽은 그 여정의 정점이 아닌 또 다른 출발점이었다. 더이상 겨울 스포츠는 서구 선진국만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대한민국은 세계가 배우는 스포츠 강국이 되었고, 평창은 우리가 세계 스포츠의 중심에 우뚝 섰음을 증명한 계단이었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스포츠는 미래를 향해 달리고 있다. 손흥민은 유럽 무대에서 아시아 축구의 새 역사를 쓰고 있고, ‘바람의 손자’ 이정후는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새로운 전설을 향해 첫 발걸음을 내디뎠다. 피겨의 차준환은 예술성과 기량을 겸비한 연기로 세계 팬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한국 남자 피겨의 새로운 시대를 열고 있다. 임시현은 집중력과 담대함으로 양궁 3관왕에 오르며 감동을 선사했고, 조용한 사격장의 양지인은 정교한 실력으로 대한민국의 내면의 힘을 전 세계에 증명하였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다음 감동을 기다리고 있다.

스포츠, 나라의 심장이 되다

우리는 언제나 땀으로 써 내려간 스포츠의 기억을 사랑했고, 그 감동을 우리 삶 속 깊이 간직해왔다. 일제의 억압 아래 운동장에서 피어난 민족의 자존심, 전쟁 폐허 속에서 달려 되찾은 국가의 자부심, 세계 무대에서 울려 퍼진 애국가와 태극기. 스포츠는 단지 경기가 아니라, 우리 민족의 영혼이 뛰던 무대였고, 이 땅을 살아낸 우리 모두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는 집단의 유산이자, 다음 세대를 향한 약속이다. 우리가 함께 흘린 땀과 눈물, 나눈 환희는 과거의 기록이 아닌, 지금도 이어지는 현재진행형의 역사이며, 앞으로도 지속될 대한민국의 정체성이다.

80년 전, 우리는 나라를 되찾았고,그 후, 우리는 스포츠로 세계를 향해 달려왔다.
우리는 스포츠로 일어났고, 하나 되었으며, 앞으로도 그 힘으로 전진할 것이다.광복 80주년.
그 위대한 발자취를 따라, 우리는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스포츠의 힘으로 다시 일어날 것이다.
글을 쓴 하웅용 교수는 한국체육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이며, 주요 연구 분야는 체육사와 스포츠정책이다. 주요 저서로는 『스포츠정책론』, 『스포츠문화사』, 『글로벌스포츠경기사』, 『한국체육사』 등이 있다. 한국체육사학회 회장을 역임하였으며, 현재 대한대학스포츠위원회 부위원장, 아시아대학스포츠연맹의 재무총장, 국제대학스포츠연맹(FISU)의 국제조정위원으로도 활동하고 있다.